갑작스럽게 비가 쏟아지던 어느날, 소나기를 피해 편의점에 들러 비닐우산을 하나 샀습니다.
투명한 비닐 너머로 쏟아지는 비를 보며 문득 영화 <킹스맨>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는 명대사와 함께 펼쳐지는 영국 신사의 우산 액션. 저에게 우산은 비를 피하는 도구이면서도, 동시에 클래식한 '신사의 품격'을 상징하는 아이템으로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당연한 이미지가 사실은 한 남자의 30년에 걸친 외로운 투쟁 끝에 얻어진 것이라면 어떨까요?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저는 패션과 젠더의 역사를 다룬 한 다큐멘터리를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알던 우산이, 사실은 수천 년간 여성의 전유물이자 '나약함'의 상징이었으며, 남자가 우산을 쓰는 것이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었던 놀라운 반전의 역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목차
1. 태양을 가리는 권력, 여성과 왕의 양산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우산의 역사는 비가 아닌 태양을 피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고대 이집트, 아시리아, 중국의 벽화와 유물을 보면, 왕이나 귀족의 머리 위에는 항상 시종이 받쳐 든 거대한 **양산(Parasol)**이 그려져 있습니다. 뜨거운 태양을 피한다는 실용적인 목적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상징적인 의미였습니다. 하늘(태양)과 땅(왕) 사이에 막을 만들어주는 양산은, 왕이 평범한 인간을 넘어 신과 같은 신성한 존재임을 보여주는 권력의 장치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권력의 상징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로 넘어가면서 점차 여성의 전유물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당시 남성들은 햇볕에 그을린 피부를 강인함의 상징으로 여겼기 때문에, 양산을 쓰는 것은 나약하고 여성스러운 행동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우산은 부유한 여성들이 하얀 피부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사치스러운 장신구였던 셈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하나의 사물이 시대와 문화에 따라 '권력'과 '나약함'이라는 정반대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 깊은 흥미를 느꼈습니다.
2. 비 내리는 런던의 조롱, 한 남자의 용감한 도전
수천 년간 여성의 것으로 여겨졌던 우산이 남성의 손에 쥐어지기까지는 한 남자의 용감하고도 외로운 투쟁이 필요했습니다. 18세기 중반, 영국 런던은 잦은 비로 악명이 높았지만, 남성이 비를 피하기 위해 우산을 쓰는 것은 여전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우산은 여전히 '프랑스풍의 여성스러운 물건'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바로 이 편견에 정면으로 맞선 인물이 바로 자선사업가이자 여행가였던 **조너스 핸웨이(Jonas Hanway)**였습니다. 그는 페르시아 여행에서 남성들이 우산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1750년경부터 런던의 거리에서 비가 올 때마다 당당하게 우산을 펼쳐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린 것은 찬사가 아닌, 지독한 조롱과 멸시였습니다. 특히 비가 오면 주 수입원이었던 마차의 운행이 줄어들 것을 걱정한 마차꾼들은 그에게 고함을 지르고, 일부러 흙탕물을 튀기며 그를 공격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보며,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일상의 풍경 하나가 누군가의 30년에 걸친 끈질긴 투쟁의 결과물일 수 있다는 사실에 숙연함을 느꼈습니다. 핸웨이는 죽기 직전까지 약 30년간 쏟아지는 비난 속에서도 꿋꿋하게 우산을 썼고, 그의 끈질긴 노력은 서서히 남성들의 인식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3. 신사의 탄생, 검은 우산과 익명의 도시
조너스 핸웨이가 시작한 변화가 사회 전체의 흐름이 된 것은 19세기 산업혁명과 함께였습니다. 이 시기, 공장과 사무실이 늘어나면서 도시에는 귀족도 노동자도 아닌, 새로운 계급인 **중산층(부르주아)**이 등장했습니다. 이들은 매일 정해진 시간에 출근해야 했고, 비싼 마차를 탈 형편은 안 되었지만, 비에 젖어 남루한 모습으로 사무실에 나타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이 새로운 도시인들에게 우산은 완벽한 해결책이었습니다. 1852년, **새뮤얼 폭스(Samuel Fox)**가 가볍고 튼튼한 강철 살 우산을 발명하면서, 우산은 이전보다 훨씬 더 실용적이고 저렴해졌습니다. 특히 장식이 배제된 검고 단단한 검은 우산은, 화려함을 버리고 합리성과 절제를 미덕으로 삼았던 빅토리아 시대의 '신사(Gentleman)' 정신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검은 우산은 이제 여성성의 상징이 아닌, 자신의 몸과 옷을 스스로 관리할 줄 아는 근대적 남성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하나의 사물이 어떻게 시대정신과 기술의 발전, 그리고 새로운 계급의 욕망과 만나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지 그 과정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었습니다.
4. 패션과 상징, 현대 우산의 두 얼굴
다큐멘터리를 보고 난 후, 저는 제 현관에 놓인 우산꽂이를 바라보았습니다. 20세기를 거치며 우산은 남녀 모두를 위한 보편적인 도구이자, 다양한 색상과 디자인을 가진 패션 아이템으로 진화했습니다.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에서 진 켈리가 우산을 들고 춤을 추는 장면은 낭만과 행복의 상징이 되었고, 영국 신사를 상징하는 '롤스로이스' 자동차의 문에는 여전히 최고급 수제 우산이 숨겨져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산은 갑작스러운 비에 편의점에서 쉽게 사고 쉽게 버리는 값싼 소모품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역사를 알고 나니, 제가 무심코 사용하는 우산 한 자루가 새롭게 보입니다. 왕의 권위에서 여성의 장신구로, 남성성을 향한 조롱에서 신사의 품격으로. 우산의 역사는 시대에 따라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의 경계가 얼마나 유동적으로 변해왔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흥미로운 증거입니다. 여러분의 우산은, 오늘 어떤 얼굴을 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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