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릴 적, 주말 아침이면 할아버지 댁 거실 풍경이 떠오릅니다. 할아버지는 돋보기안경을 쓴 채 신문 한 귀퉁이에 난 검고 하얀 칸들을 연필로 끙끙대며 채워나가셨습니다. 그 진지한 표정 앞에서 저는 감히 말도 붙이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문득 이 '십자말풀이'라는 흑백의 퍼즐이 어떻게 우리 할아버지 세대의 아침을, 그리고 전 세계 수많은 사람의 여가 시간을 사로잡았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이 호기심을 풀기 위해 저는 인류의 놀이 문화사를 다룬 트리스탄 도노반의 책 『게임, 세상을 어떻게 바꿨는가(It's All a Game)』를 다시 펼쳐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작은 단어 퍼즐이 사실은 한 신문사의 연말 특집으로 우연히 탄생하여, 대공황 시대 사람들에게 작은 위안을 주었고, 마침내 지식과 유희를 결합한 가장 대중적인 두뇌 스포츠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목차

1. 최초의 '워드-크로스', 신문사의 연말 선물
책에 따르면, 우리가 아는 십자말풀이의 역사는 놀랍게도 그리 길지 않습니다. 그 탄생일은 1913년 12월 21일, 일요일로 정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미국 신문 <뉴욕 월드(New York World)>의 '펀(Fun)' 섹션 편집자였던 아서 윈(Arthur Wynne)은 연말 크리스마스 특집호를 위한 새로운 읽을거리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들려주었던 '마방진(Magic Square)' 놀이에서 영감을 얻어, 가로세로 단어를 맞추어 다이아몬드 모양의 격자를 채우는 새로운 형식의 단어 퍼즐을 고안해 냈습니다. 그는 이 퍼즐에 '워드-크로스(Word-Cross)'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세상을 바꾼 많은 발명이 종종 이처럼 거창한 계획이 아닌, 마감에 쫓기던 한 편집자의 소박한 아이디어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에 미소를 짓게 되었습니다. 최초의 십자말풀이는 지금처럼 정사각형이 아닌 다이아몬드 모양이었고, 규칙도 훨씬 단순했습니다. 하지만 독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신문사에는 다음 퍼즐을 실어달라는 독자들의 편지가 쇄도했고, '워드-크로스'는 <뉴욕 월드>의 가장 인기 있는 코너로 자리 잡았습니다.
2. 대공황의 위안, 미국을 휩쓴 십자말풀이 열풍
1920년대, 십자말풀이는 <뉴욕 월드>를 넘어 미국 전역의 신문으로 퍼져나가며 그야말로 '국민적인 열풍(Craze)'을 일으켰습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나 하는 유치한 놀이"라며 십자말풀이를 외면했던 경쟁 신문사들도, 독자들의 거센 요구에 못 이겨 앞다투어 퍼즐을 싣기 시작했습니다. 1924년에는 최초의 십자말풀이 단행본이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사람들은 기차 안에서, 공원에서, 심지어 극장에서도 연필을 들고 십자말풀이에 몰두했습니다. 하지만 십자말풀이가 진정으로 미국인들의 삶에 깊숙이 파고든 것은 1929년 대공황의 어두운 그림자가 덮쳤을 때였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며, 시대의 고통이 어떻게 새로운 문화의 자양분이 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신문 한 장과 연필 한 자루만 있으면 즐길 수 있는 십자말풀이는 값싸고도 품위 있는 위안이었습니다. 복잡하고 통제 불가능한 현실의 문제에서 잠시 벗어나, 명확한 정답이 존재하는 흑백의 세계에 몰두하는 지적인 즐거움. 십자말풀이는 사람들에게 작은 성취감과 세상이 아직은 이성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믿음을 선물했습니다.
3. 뉴욕 타임스의 격조, 지성의 상징이 되다
십자말풀이를 단순한 대중적 유행을 넘어, '고급스러운 지적 유희'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바로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였습니다. 다른 신문들이 십자말풀이 열풍에 휩쓸릴 때도, <뉴욕 타임스>는 "시간 낭비일 뿐"이라며 십수 년간 퍼즐 싣기를 거부하며 고고한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진주만 공습 이후, 전쟁의 불안감에 시달리는 독자들에게 위안을 주어야 한다는 명분 아래 1942년부터 마침내 십자말풀이를 싣기 시작했습니다. 대신, 그들은 다른 신문과는 차별화된, 가장 어렵고 정교하며 위트 있는 퍼즐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뉴욕 타임스>의 편집자 마거릿 파라(Margaret Farrar)는 대칭적인 격자무늬, 재치 있는 말장난과 암시가 담긴 힌트, 시사 상식과 고전 지식을 아우르는 폭넓은 어휘 등, 오늘날 '미국식 십자말풀이'의 표준이 된 엄격한 규칙과 스타일을 확립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하나의 놀이가 어떻게 그 자체의 '미학'과 '격조'를 갖게 되는지 그 흥미로운 과정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 <뉴욕 타임스>의 일요일 판 십자말풀이를 막힘없이 푸는 것은, 미국 지성인들 사이에서 자신의 지식과 교양을 증명하는 일종의 '자격시험'이자 명예로운 상징이 되었습니다.
4. 디지털 시대의 두뇌 훈련, 십자말풀이의 진화
책을 덮고, 저는 할아버지가 연필로 채워나가던 그 신문 귀퉁이를 다시 떠올려보았습니다. 종이 신문의 시대는 저물었지만, 십자말풀이의 정신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에 맞게 그 형태를 바꾸며 여전히 살아남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스마트폰 앱을 통해 언제 어디서든 십자말풀이를 즐기고, 전 세계의 사람들과 풀이 시간을 경쟁합니다. '스도쿠'나 '워들(Wordle)'과 같은 수많은 디지털 퍼즐 게임들은 모두 십자말풀이가 닦아놓은 길 위에서 탄생한 후예들입니다. 더 나아가, 십자말풀이는 단순한 오락을 넘어, 뇌를 자극하여 치매를 예방하고 인지 능력을 유지하는 *'두뇌 훈련(Brain Training)'의 도구로 그 가치를 재조명받고 있습니다. 제가 어릴 적 할아버지의 진지한 표정에서 보았던 것은, 어쩌면 단순히 시간을 보내는 행위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지적인 호기심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삶에 대한 열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한 신문사의 연말 선물에서 시작된 작은 단어 퍼즐. 그 흑백의 격자무늬가 한 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어떻게 수많은 사람의 두뇌를 깨우고, 우리에게 지적인 즐거움을 선물했는지 생각해 보니, 앞으로는 저도 주말 아침마다 십자말풀이를 풀어봐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풀어본 가장 기억에 남는 십자말풀이 힌트는 무엇이었나요?
여론의 탄생, 신문은 어떻게 제4의 권력이 되었나
아침에 눈을 뜨면 스마트폰으로 밤새 일어난 세상 소식을 확인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손가락 하나로 전 세계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접하는 이 당연한 일상. 문득 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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