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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것들의 역사

여성의 손가락 끝에서 시작된 혁명, 타자기는 어떻게 사무실의 풍경을 바꾸었나

by handago-blog 2025. 9. 6.

오늘도 저는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며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익숙하게 손가락을 놀려 제 생각을 화면 위에 펼쳐내는 이 행위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상이 되었습니다. 문득 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을, 지금은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타자기(Typewriter)가 떠올랐습니다. 그저 낡고 불편한 기계라고만 생각했던 타자기가, 사실은 수많은 여성에게 사무실의 문을 열어준 혁명의 도구이자, 현대 오피스의 풍경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위대한 발명품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저는 기술이 사회를 어떻게 바꾸는지 탐구하는 PBS의 다큐멘터리 시리즈 <아메리칸 익스피리언스(American Experience)>의 관련 에피소드를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매일 듣는 이 경쾌한 키보드 소리가, 사실은 19세기 여성들의 손가락 끝에서 시작된 거대한 사회 변혁의 메아리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성의 손가락 끝에서 시작된 혁명, 타자기

 

목차

  1. '문자를 쓰는 피아노', 서투른 기계의 탄생
  2. 레밍턴의 도박과 '타자수 소녀'의 등장
  3. QWERTY 자판의 아이러니, 느림보가 표준이 되다
  4. 사무실의 새로운 소리, 여성이 만든 현대 오피스

1. '문자를 쓰는 피아노', 서투른 기계의 탄생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우리가 아는 타자기의 직접적인 조상은 1868년 미국의 발명가 **크리스토퍼 숄스(Christopher Latham Sholes)**에 의해 탄생했습니다. '문자를 쓰는 피아노'라 불렸던 초기의 타자기는 지금의 날렵한 키보드와는 거리가 먼, 크고 서투른 기계였습니다. 타자기가 처음 발명되었을 때, 가장 큰 문제는 타자기가 너무 '빨리' 쳐지면 활자를 치는 가느다란 막대기들이 서로 엉켜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초기 모델은 타자기의 아랫면을 때리는 방식이라, 자신이 친 글자가 종이에 제대로 찍혔는지 확인하려면 종이를 빼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블라인드 타이핑' 방식이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모든 기술의 시작이 이처럼 불완전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는 사실에 미소를 짓게 되었습니다. 이 엉성한 기계는 처음에는 작가나 언론인들 사이에서조차 "기계로 쓴 편지는 성의가 없다"는 비판을 받으며 외면당했습니다. 하지만 이 서투른 발명품 속에는, 펜과 잉크가 지배하던 수천 년의 기록 문화를 뒤흔들 혁명적인 잠재력이 숨어 있었습니다.

2. 레밍턴의 도박과 '타자수 소녀'의 등장

상업적으로 실패할 뻔했던 이 기계의 운명을 바꾼 것은 뜻밖에도 총기를 만들던 회사, **레밍턴(Remington and Sons)**이었습니다. 남북전쟁이 끝나며 총기 주문이 급감하자, 새로운 사업을 찾던 레밍턴은 숄스의 타자기에 대한 권리를 사들여 1874년 '레밍턴 No. 1' 모델을 대량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진짜 혁명은 기계가 아닌, 그 기계를 사용하는 '사람'을 마케팅한 전략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레밍턴은 타자기를 팔기 위해, 이 기계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을 함께 '공급'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새로운 직업의 주인공으로 바로 여성을 선택했습니다. 당시 여성에게 허락된 일자리는 교사나 간호사, 공장 노동자 등 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레밍턴은 YWCA와 같은 여성 단체와 협력하여 타자 교육 과정을 개설하고, 수많은 여성들을 전문 *'타자수(Typewriter Girl)'로 양성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기술의 역사가 단순히 기계의 발전사가 아니라, 사회와 문화의 변화와 얼마나 깊이 얽혀 있는지를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타자수'는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존중받으며 사무실이라는 새로운 공간에 진출할 수 있었던 최초의 전문직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남성들만 가득했던 사무실에 여성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3. QWERTY 자판의 아이러니, 느림보가 표준이 되다

타자기의 역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는 바로 우리가 오늘날까지도 사용하고 있는 QWERTY 자판 배열의 탄생 비화입니다. 저는 당연히 이 자판 배열이 가장 빠르게 칠 수 있도록 과학적으로 설계되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QWERTY 자판은 사실 타자 속도를 '더 빠르게'가 아니라, '더 느리게' 만들기 위해 고안되었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 초기 타자기는 너무 빨리 치면 활자 막대들이 서로 엉키는 기계적 결함이 있었습니다. 숄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어에서 자주 함께 사용되는 알파벳 조합(예: TH, ER)을 일부러 손가락이 움직이기 어려운 위치에 흩어 놓아 타이핑 속도를 늦추는 방식을 고안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QWERTY의 비밀입니다. 이후 훨씬 더 효율적이고 빠른 '드보락(Dvorak)'과 같은 자판 배열이 발명되었지만, 이미 레밍턴 타자기를 통해 QWERTY에 익숙해진 수많은 타자수들과 기업들의 관성을 되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알고 나서, 역사 속에서 '최고'가 아닌 '최초'가 어떻게 표준이 되어 세상을 지배하게 되는지, 그 거대한 경로 의존성의 힘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4. 사무실의 새로운 소리, 여성이 만든 현대 오피스

다큐멘터리를 보고 난 후, 저는 제가 매일 듣는 키보드 소리가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19세기 말, 타자기의 등장은 사무실의 풍경과 소리, 그리고 문화를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이전까지 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만 들리던 조용한 사무실은, 수십, 수백 대의 타자기가 만들어내는 '타닥타닥'하는 경쾌하고 기계적인 소리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이는 곧 업무의 속도와 효율성을 상징하는 새로운 시대의 사운드트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리의 중심에는 바로 새로운 여성 노동자들이 있었습니다. 타자기는 여성들에게 경제적 독립과 사회적 자립의 기회를 제공하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습니다. 여성들은 더 이상 가정에만 머무르지 않고, 도시의 심장부인 사무실로 출근하며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나갔습니다. 물론, 타자수가 '여성의 일'로 고정되면서 새로운 성별 직업 분리가 생겨나는 문제도 있었지만, 타자기가 여성의 사회 진출에 결정적인 문을 열어주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제가 무심코 두드리는 키보드 한 타 한 타에, 이처럼 사무실의 풍경을 바꾸고, 여성의 삶을 변화시킨 위대한 혁명의 역사가 담겨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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