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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것들의 역사

낯선 이를 위한 안식처, 호텔은 어떻게 여행의 풍경을 바꾸었나

by handago-blog 2025. 9. 3.

낯선 도시로 출장을 가게되어 비즈니스 호텔에서 숙박을 하였습니다. 체크인을 하고 카드키로 문을 여는 순간, 저는 집과 똑같이 편안하면서도 완벽히 익명인 공간에 들어서는 묘한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문득 이 당연한 경험, 즉 낯선 도시에서 돈만 내면 누구든 안전하고 깨끗한 잠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약속이 언제부터 가능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이 호기심을 풀기 위해 저는 빌 브라이슨의 유쾌한 탐험기 『나를 부르는 숲(A Walk in the Woods)』에서 그가 길 위에서 겪었던 다양한 숙소 경험들을 다시 떠올려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호텔이라는 안식처가, 사실은 수천 년에 걸친 여행의 풍경과 인간의 관계 맺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위대한 발명품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낯선 이를 위한 안식처, 호텔

목차

  1. 호텔 이전의 시대, 낯선 이에 대한 불신과 위험
  2. 마차 시대의 허브, 코칭 인(Coaching Inn)의 등장
  3. 럭셔리의 탄생, 그랜드 호텔의 시대
  4. 자동차와 표준화, 모든 이를 위한 호텔

1. 호텔 이전의 시대, 낯선 이에 대한 불신과 위험

책의 여정을 따라가기 전, 저는 호텔이 없던 시대를 먼저 상상해 보았습니다. 고대와 중세 시대에 '여행'은 오늘날처럼 낭만적인 것이 아니라, 위험과 고난으로 가득 찬 일이었습니다. 길 위에는 도적들이 들끓었고, 낯선 마을에 도착해도 여행자를 위한 공식적인 숙소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여행자는 운이 좋으면 수도원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거나, 마을의 선술집(Tavern) 구석에서 다른 사람들과 뒤섞여 잠을 청해야 했습니다. 당시의 숙소는 프라이버시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지극히 공동체적인 공간이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하나의 큰 방에서 잠을 잤고, 심지어 하나의 침대를 낯선 사람과 함께 쓰는 일도 흔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오늘날 우리가 호텔 방 문을 잠그는 행위가 얼마나 큰 역사적 진보의 산물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낯선 이에 대한 불신이 팽배했던 시대, 여행자에게 안전하고 독립된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2. 마차 시대의 허브, 코칭 인(Coaching Inn)의 등장

여행의 풍경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이후, 유럽의 도로망이 정비되고 정기 노선을 오가는 역마차(Stagecoach)가 등장하면서부터입니다. 역마차가 중간에 말을 갈아타거나 승객들이 하룻밤을 묵어갈 수 있는 거점, 즉 '코칭 인(Coaching Inn)'이 탄생한 것입니다. 이 코칭 인은 이전의 선술집보다 훨씬 더 체계적이고 규모가 큰 숙박 시설이었습니다. 마구간, 식당, 그리고 여러 등급의 객실을 갖추고 있었죠. 하지만 이곳 역시 오늘날의 호텔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코칭 인은 단순히 잠만 자는 곳이 아니라, 그 지역의 모든 소식과 사람이 모여드는 시끌벅적한 사회적 허브였습니다. 여행객, 상인, 지역 주민들이 한데 어우러져 술을 마시고 정보를 교환하는, 지극히 공적인 공간이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보며, '숙소'라는 공간의 의미가 시대에 따라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흥미롭게 생각했습니다. 오늘날의 호텔이 외부 세계와의 단절을 제공한다면, 당시의 코칭 인은 오히려 외부 세계와의 적극적인 연결을 제공했던 것입니다.

3. 럭셔리의 탄생, 그랜드 호텔의 시대

19세기 산업혁명과 철도의 등장은 여행의 개념을 다시 한번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속도와 편안함으로 대륙을 횡단할 수 있게 되자, 부와 여유를 가진 새로운 여행 계층이 탄생했습니다. 바로 이 새로운 고객들을 위해, 런던, 파리, 뉴욕과 같은 대도시의 중심부에는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화려하고 웅장한 '그랜드 호텔(Grand Hotel)'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사보이, 리츠, 월도프 아스토리아와 같은 호텔들은 단순히 잠만 자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최상류층의 사교계 그 자체였습니다. 대리석 로비, 크리스털 샹들리에, 개인 욕실이 딸린 호화로운 객실, 그리고 완벽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유니폼 입은 직원들. 호텔은 이제 여행의 과정이 아닌, 여행의 목적지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호텔이 어떻게 '필요'의 영역에서 '욕망'의 영역으로 진화했는지 그 극적인 변화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호텔은 이제 낯선 이를 위한 최소한의 안식처가 아니라, 선택받은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환상의 공간이 된 것입니다.

4. 자동차와 표준화, 모든 이를 위한 호텔

책을 덮고, 저는 제가 묵었던 평범한 비즈니스호텔을 다시 떠올려보았습니다. 20세기, 자동차의 대중화는 또다시 여행의 풍경을 바꾸었습니다. 철도가 닿지 않는 곳까지 자유롭게 여행하는 새로운 여행자들, 즉 자동차 여행객이 등장했습니다. 이들을 위해 탄생한 것이 바로 길가의 '모텔(Motel, Motor Hotel)'입니다. 그리고 1952년, 미국의 사업가 케몬스 윌슨(Kemmons Wilson)은 잦은 가족 여행에서 겪었던 불결하고 예측 불가능한 숙소에 대한 불만 끝에, 위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립니다. 바로 미국 어디를 가든 똑같은 품질의 깨끗한 객실과 편의 시설을 보장하는 표준화된 호텔 체인, '홀리데이 인(Holiday Inn)'의 탄생입니다. 깨끗한 침대, 개인 욕실, TV, 에어컨, 그리고 수영장까지. 홀리데이 인의 성공은 '럭셔리'가 아닌 '신뢰'와 '예측 가능성'을 판매한 것이었습니다. 이 혁신은 여행을 소수의 특권에서 모든 중산층이 누릴 수 있는 보편적인 권리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낯선 이에 대한 불신에서 시작된 인류의 잠자리는, 마침내 모든 낯선 이에게 똑같은 안락함을 약속하는 거대한 신뢰의 시스템으로 진화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호텔'이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