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소한것들의 역사

원래 남성 군인을 위해 발명되었다? 하이힐의 놀라운 젠더 역사

by handago-blog 2025. 7. 27.

중요한 모임이 있는 날은 평소보다 높은 굽의 하이힐을 신고 집을 나섭니다. 평소보다 높아진 눈높이와 높아진 눈높이만큼 자신감 또한 올라가는 가는 기분을 느낍니다. 날렵한 곡선, 아찔한 높이. 하이힐은 오늘날 여성성과 관능미, 그리고 때로는 프로페셔널한 권위를 상징하는 가장 강력한 패션 아이템 중 하나입니다. 수많은 여성이 하이힐을 신으며 느끼는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그 특별한 실루엣이 주는 자신감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 지극히 여성적인 물건이 본래 말을 탄 남성 군인들이 전투력을 높이기 위해 신던 실용적인 '군사 장비'에서 시작되었다면 어떨까요? 어떻게 남성들의 발밑에서 시작된 굽 높은 신발이 수백 년의 시간을 거쳐 여성의 전유물이자, 젠더 논쟁의 가장 뜨거운 아이템 중 하나가 될 수 있었을까요?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저는 얼마 전 시청했던 BBC의 패션 역사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가진 상식이 완전히 무너지는 충격을 경험했습니다. 오늘날 여성성의 가장 강력한 상징인 하이힐이, 본래 말을 탄 남성 군인들을 위한 실용적인 '군사 장비'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지금부터 페르시아의 전장을 달려 유럽의 왕궁을 거쳐, 현대 여성의 옷장에 이르기까지, 하이힐이 걸어온 아찔하고도 위험한 젠더의 역사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원래 남성 군인을 위해 발명되었다? 하이힐

1. 전장의 발명품: 페르시아 남성 기병의 실용적 도구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하이힐의 역사는 놀랍게도 화려한 파티장이 아닌, 10세기경 페르시아(오늘날의 이란)의 거친 전장에서 시작됩니다. 당시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페르시아 기병들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데 능숙했습니다. 하지만 달리는 말 위에서 몸을 일으켜 활을 쏠 때, 발이 등자(stirrup)에서 미끄러지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치명적인 문제였습니다.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들은 신발에 을 달기 시작했습니다. 굽이 등자를 단단히 고정시켜 주어, 기수들은 훨씬 안정적인 자세로 활을 쏠 수 있었고 전투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즉, 최초의 하이힐은 미적인 목적이 아닌, 오직 전장에서의 생존과 승리를 위한 철저히 실용적이고 남성적인 군사 발명품이었습니다. 이 페르시아의 굽 높은 신발은 16세기말, 페르시아의 샤 압바스 1세가 오스만 제국에 맞서기 위해 유럽과 동맹을 맺으면서 외교 사절단을 통해 유럽에 전파되었습니다. 유럽의 귀족들은 이국적인 페르시아 문화에 매료되었고, 특히 그들의 굽 높은 신발에 담긴 남성적인 강인함과 이국적인 매력에 열광하기 시작했습니다.

2. 권력의 상징: 루이 14세와 귀족 남성의 전유물

17세기 유럽, 하이힐은 순식간에 부와 권력을 가진 귀족 남성들 사이에서 최고의 패션 아이템으로 떠올랐습니다. 당시 유럽의 도시는 진흙과 오물로 가득했기 때문에, 굽 높은 신발은 옷자락을 더러움으로부터 보호하는 실용적인 역할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이힐이 주는 상징적인 의미였습니다. 키가 커 보이게 만들어 권위를 높여주고,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 상류층이라는 것을 과시하는 수단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하이힐 패션의 정점에는 '태양왕' 루이 14세가 있었습니다. 키가 163cm에 불과했던 그는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10cm가 넘는 화려한 하이힐을 즐겨 신었습니다. 특히 그는 자신의 구두굽을 붉은색으로 칠했는데, 당시 붉은색 염료는 매우 비싸고 귀했기 때문에 붉은 굽(Red Heels)은 오직 왕과 그에게 총애를 받는 최측근 귀족들만이 허락된 절대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붉은 굽의 하이힐을 신는다는 것은 곧 왕의 남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3. '남성성의 대포기'와 하이힐의 여성화

18세기 중반, 계몽주의 사상이 확산되고 프랑스혁명이 발발하면서 유럽 사회는 거대한 변화를 맞이합니다. 이성과 합리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시대정신 속에서, 귀족 남성들의 화려하고 비실용적인 패션은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되기 시작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를 '남성성의 대포기(The Great Male Renunciation)'라고 부릅니다. 남성들은 레이스와 가발, 화려한 색상의 옷과 하이힐을 벗어던지고, 실용적이고 합리적이며 어두운 색상의 근대적인 복장(오늘날 슈트의 원형)을 선택하기 시작했습니다. '일하는 부르주아'의 남성성이 '과시하는 귀족'의 남성성을 대체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인 것으로 여겨진 하이힐은 자연스럽게 남성들의 옷장에서 사라졌습니다. 바로 이 빈자리를 여성들이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남성들이 버린 하이힐을 여성들이 패션의 도구로 받아들이면서, 하이힐은 점차 여성성을 상징하는 아이템으로 그 의미가 완전히 전환되었습니다. 19세기 들어 사진 기술이 발달하면서, 다리를 꼬고 하이힐을 신은 여성의 모습이 에로틱한 이미지로 소비되기 시작했고, 하이힐과 여성성의 연결고리는 더욱 단단해졌습니다.

4. 해방과 억압의 경계, 나의 하이힐

20세기에 들어 하이힐은 스틸레토 힐의 등장과 함께 관능미의 절정을 상징하게 되었고, 때로는 여성의 사회 진출 속에서 자신감을 표현하는 '권력의 도구'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페미니즘 진영에서는 여성의 자유로운 활동을 제약하고, 남성적 시선에 맞춰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억압의 도구'라는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되었습니다. 이 모든 역사를 알고 나서, 저는 제가 신고 있는 하이힐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 아찔한 높이 속에는 페르시아 기병의 용맹함, 루이 14세의 권력욕, 그리고 수백 년에 걸친 여성들의 욕망과 투쟁이 함께 담겨 있었습니다. 하이힐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위한 신발이 아니라, 시대의 정신을 담고 끊임없이 그 의미를 바꾸어 온 하나의 역사책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신발장 속에 있는 신발은, 오늘 여러분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나요?

 

아름다움을 위한 고통의 도구, 코르셋이 옥죄었던 여성의 몸과 정신

가느다란 허리와 풍만한 가슴, 이상적인 여성미를 구현하기 위한 도구였던 코르셋. 하지만 그 아름다움의 이면에는 갈비뼈 변형과 장기손상, 그리고 여성의 자유를 억압했던 고통의 역사가 숨

handag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