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보다 강했던 기적의 섬유, 나일론 스타킹과 2차 세계대전

오랜만에 스커트를 챙겨 입고 스타킹을 신어보았습니다. 조심스럽게 신는다고 했는데도 까실거리는 손톱에 걸려 어이없이 올이 나가버렸습니다. 한 번 신고 버리게 된 스타킹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약하고 저렴한 물건은 언제부터 신게 된 걸까?' 이 작은 궁금증을 풀기 위해 저는 얼마 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The Met)의 온라인 아카이브에서 패션 관련 자료들을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알던 스타킹이, 특히 나일론 스타킹이 결코 약하거나 하찮은 존재가 아니었음을 깨닫고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제가 무심코 버린 이 얇은 직물이, 한때는 '강철보다 강한 기적의 섬유'로 불리며 전쟁의 승패까지 좌우했던 위대한 발명품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지금부터 저의 이 작은 호기심에서 시작된, 나일론 스타킹의 위대한 여정을 함께 따라가 보려 합니다.

목차

1. '기적의 섬유'의 탄생: 뒤퐁의 화학 실험실
2. 열광과 광기, '나일론 데이'와 여성들의 욕망
3. 전쟁의 부름: 스타킹에서 낙하산으로
4. 전후의 귀환과 새로운 시대의 상징

1. '기적의 섬유'의 탄생: 뒤퐁의 화학 실험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자료에 따르면, 20세기 초 여성용 스타킹의 주재료는 비싸고 섬세한 실크(비단)였습니다. 실크 스타킹은 아름다웠지만 가격이 매우 비쌌고, 올이 쉽게 나가 저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엄두도 내기 어려운 사치품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 미국 실크 시장의 90% 이상을 일본이 장악하고 있어, 국제 정세에 따라 가격이 요동치는 불안정한 원자재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미국의 거대 화학 기업 뒤퐁(DuPont)은 '실크를 대체할 인공 섬유' 개발에 회사의 명운을 걸었습니다. 뒤퐁은 하버드 대학의 천재 화학자 월리스 캐러더스를 영입하여 연구를 이끌게 했고, 수년간의 연구 끝에 1935년, 그의 팀은 석탄, 물, 공기에서 추출한 물질로 가늘고 질긴 섬유를 뽑아내는 데 성공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 최초의 완전한 합성 섬유, 나일론(Nylon)의 탄생이었습니다. "강철보다 강하고 거미줄보다 가늘다"는 캐치프레이즈와 함께 공개된 나일론은 그야말로 세상을 놀라게 한 '기적의 섬유'였습니다. 뒤퐁은 이 혁신적인 섬유의 첫 번째 적용 대상으로 여성용 스타킹을 선택했고, 이는 곧 다가올 거대한 패션 혁명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습니다.

2. 열광과 광기, '나일론 데이'와 여성들의 욕망

1940년 5월 15일, 뒤퐁은 미국 전역의 백화점에서 나일론 스타킹을 공식적으로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날은 훗날 '나일론 데이(N-Day)'라 불리며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당시 아카이브의 흑백 사진에 담긴 여성들의 반응은 제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실크보다 저렴하면서도 훨씬 질기고, 다리에 완벽하게 밀착되어 각선미를 돋보이게 해주는 이 새로운 스타킹을 사기 위해, 여성들은 백화점 문이 열리기 몇 시간 전부터 끝이 보이지 않는 줄을 섰습니다. 일부 도시에서는 스타킹을 차지하려는 여성들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져 '나일론 폭동(Nylon Riots)'이라 불리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판매 첫날에만 400만 켤레에 가까운 나일론 스타킹이 순식간에 동이 났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나니, 나일론 스타킹이 단순히 실크의 대체품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과학 기술이 만들어낸 풍요와 현대적인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아이콘이었습니다. 여성들은 나일론 스타킹을 신음으로써 낡은 관습을 벗고 새로운 시대의 당당한 주체가 된 듯한 해방감을 느꼈던 것입니다.

3. 전쟁의 부름: 스타킹에서 낙하산으로

여성들의 다리를 화려하게 장식하던 나일론 스타킹의 운명은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완전히 뒤바뀝니다.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본격적으로 참전하게 되자, 나일론은 사치품에서 국가 안보를 위한 핵심 전략 물자로 그 지위가 격상되었습니다. 뒤퐁은 나일론 스타킹 생산을 전면 중단하고, 모든 나일론 생산 시설을 군수품 생산에 투입했습니다. 나일론의 놀라운 강도와 내구성, 가벼움은 전쟁터에서 그 진가를 발휘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용도는 바로 낙하산이었습니다. 이전까지 낙하산은 주로 실크로 만들어졌는데, 전쟁으로 인해 주요 실크 공급원이었던 일본과의 교역이 끊기자 나일론은 완벽한 대체재가 되었습니다. 나일론 낙하산은 공수부대원들의 생명을 지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일론은 전투기 타이어 보강재, 밧줄, 텐트, 모기장, 수술용 봉합사에 이르기까지 전쟁에 필요한 거의 모든 군용 장비에 사용되었습니다. 한때 스타킹을 사기 위해 폭동을 벌였던 여성들은 이제 "나일론 스타킹을 신는 것은 조국에 대한 배신"이라는 구호 아래, 신던 스타킹을 수거함에 기부하는 애국 운동에 동참했습니다. 여성들의 옷장에서 사라진 나일론 스타킹은 그렇게 전쟁터의 하늘에서, 병사들의 생명을 구하는 '기적의 섬유'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4. 전후의 귀환과 새로운 시대의 상징

1945년, 길고 길었던 2차 세계대전이 끝났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여성들이 가장 먼저 기다린 것 중 하나는 바로 나일론 스타킹의 귀환이었습니다. 전쟁 기간 동안 억눌렸던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은 전후에 다시 한번 폭발했습니다. 뒤퐁이 나일론 스타킹 생산을 재개하자, 1940년의 '나일론 데이'를 훨씬 능가하는 거대한 규모의 '나일론 폭동'이 미국 전역에서 일어났습니다. 피츠버그에서는 4만 명의 여성이 1만 3천 켤레의 스타킹을 사기 위해 거대한 줄을 섰고, 일부 여성들은 실신하기까지 했습니다. 나일론 스타킹은 이제 단순히 패션 아이템을 넘어, 전쟁의 공포를 이겨내고 되찾은 평화와 풍요, 그리고 다시 돌아온 여성성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화학 실험실의 우연한 발명품에서 시작해, 한 시대의 욕망을 담고, 세계 대전의 향방에 기여했으며, 마침내 평화의 상징으로 돌아온 나일론 스타킹. 그 얇고 투명한 올 속에는 20세기의 가장 드라마틱한 역사와 시대정신이 고스란히 짜여 있습니다. 여러분이 매일 마주하는 사소한 것들 속에는 또 어떤 놀라운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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