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며칠 전, 요즘 유행한다는 베이글 맛집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고 잠시 망설였습니다. '이걸 기다려서 먹어야 하나?'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얌전히 줄의 맨 끝에 섰습니다. 제 앞에 선 사람도, 제 뒤에 선 사람도 모두 불평 없이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그 침묵의 질서 속에서, 문득 이 '줄서기'라는 행위가 참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누가 시키거나 감시하지 않아도,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먼저 온 사람이 먼저'라는 이 보이지 않는 약속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 당연한 사회적 습관이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궁금해져, 저는 공공질서의 기원을 다룬 사회학자 레옹 드 마트의 가상 서적 『보이지 않는 질서(The Invisible Order)』의 한 챕터를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평범한 줄서기가 사실은 프랑스 혁명의 평등사상에서 태어난 비교적 새로운 발명품이자, 현대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근본적인 '사회 계약'의 상징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목차
- 줄이 없던 시절, 힘과 특권이 지배하던 혼돈
- 프랑스 혁명의 함성, '평등'이 만든 최초의 줄
- 영국의 품격, 질서정연한 '큐(Queue)'의 완성
- 보이지 않는 계약, 문명의 척도가 되다
1. 줄이 없던 시절, 힘과 특권이 지배하던 혼돈
책에 따르면,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줄서기는 인류 역사에서 매우 최근에 등장한 발명품입니다. 그 이전의 세상은 말 그대로 '힘과 특권'이 지배하는 혼돈의 공간이었습니다. 빵집 앞에 빵을 사려는 사람들이 몰려들면, 그들은 줄을 서는 대신 아귀다툼을 벌였습니다. 가장 힘이 세거나, 가장 목소리가 크거나, 혹은 주인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 먼저 빵을 차지했습니다. 극장 입구에서는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이 가난한 사람들을 밀치고 먼저 들어가는 것이 당연한 풍경이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공정함'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현대적인 가치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먼저 온 사람이 먼저'라는 생각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사회적 지위와 물리적인 힘이 곧 순서였고, 약자들은 언제나 맨 뒤로 밀려나는 것이 세상의 이치였습니다. 이는 단순히 무질서한 상태를 넘어, 불평등한 사회 구조가 일상의 모든 장면에 그대로 투영된 결과였습니다. 줄의 부재는 곧 평등의 부재였던 셈입니다.
2. 프랑스 혁명의 함성, '평등'이 만든 최초의 줄
이 수천 년간의 혼돈에 질서를 부여한 최초의 아이디어는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의 거대한 함성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자유, 평등, 박애"를 외쳤던 혁명은 단순히 왕의 목을 치는 정치적 사건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다'는 근대적 사상을 대중의 삶 속에 뿌리내리게 한 거대한 문화 혁명이었습니다. 바로 이 '평등'이라는 가치가, 빵집 앞의 풍경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굶주린 파리 시민들은 더 이상 귀족이나 부자가 새치기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줄을 서기 시작했고, '먼저 온 사람이 먼저(First come, first served)'라는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며, 줄서기라는 이 사소한 행위가 사실은 가장 위대한 민주주의의 실천이었음을 깨닫고 전율했습니다. 줄을 선다는 것은, 나의 사회적 지위나 부와 상관없이, 오직 '시간'이라는 가장 공평한 기준 앞에서 모두가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것을 몸으로 선언하는 행위였습니다. 빵집 앞에서 시작된 이 작은 질서는, 곧 구시대의 특권에 맞서는 새로운 시민 사회의 가장 강력한 상징이 되었습니다.
3. 영국의 품격, 질서정연한 '큐(Queue)'의 완성
프랑스 혁명이 줄서기의 '정신'을 탄생시켰다면, 그 '형식'을 완성하고 세계적인 문화로 확산시킨 나라는 바로 19세기 영국이었습니다. 산업혁명으로 수많은 사람이 도시로 몰려들면서, 런던과 같은 대도시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혼잡함에 직면했습니다. 버스를 타기 위해, 기차표를 사기 위해, 극장에 들어가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몰려들었습니다. 바로 이 도시의 혼잡함 속에서, 영국인들은 줄서기를 사회적 혼란을 해결하는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특히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거치며 식량을 배급받기 위해 길게 늘어섰던 경험은, 줄서기를 '영국인의 품격(Britishness)'을 상징하는 국민적 미덕으로 만들었습니다. 묵묵히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인내심과, 어려운 상황에서도 공정함을 잃지 않으려는 태도는 영국인들의 자부심이 되었습니다. '줄'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큐(Queue)'가 프랑스어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프랑스에서 시작된 아이디어를 영국이 어떻게 자신들의 문화로 완성시켰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증거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하나의 사회적 습관이 어떻게 한 국가의 정체성과 자부심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는지 그 놀라운 과정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4. 보이지 않는 계약, 문명의 척도가 되다
책을 덮고, 저는 제가 서 있던 베이글 가게 앞의 줄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습니다. 이제 줄서기는 전 세계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문명화된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보이지 않는 사회 계약'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줄을 서면서, 나의 즉각적인 이익을 잠시 보류하고, 더 큰 사회적 질서와 공정함의 가치를 존중하겠다는 암묵적인 약속을 합니다. 이 약속은 법으로 강제되지 않지만, 우리는 새치기하는 사람을 보면 본능적으로 분노하고 비난합니다. 그것은 단지 나의 순서를 빼앗겼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지키기로 약속한 이 신성한 사회 계약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제가 무심코 섰던 이 줄 한가운데에, 이처럼 특권의 시대를 끝내고 평등의 시대를 연 위대한 혁명의 정신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의 논리가 아닌, 시간의 순리라는 가장 공정한 규칙. 어쩌면 한 사회의 문명 수준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얼마나 질서정연하게 줄을 설 수 있는지로 가늠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이 오늘 섰던 그 줄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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