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며칠 전,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다가 문득 매장 전체에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음악 소리를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게, 마치 공기처럼 공간을 채우고 있는 그 잔잔한 선율. 저는 왜 모든 쇼핑몰과 엘리베이터에서는 약속이라도 한 듯 비슷한 음악이 나올까 궁금해졌습니다. 이 호기심을 풀기 위해 저는 소리가 인간의 심리에 미치는 영향을 파헤친 조셉 란자의 책 『엘리베이터 뮤직(Elevator Music)』을 펼쳐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무심코 듣던 이 '배경음악'이, 사실은 20세기 초 공장 노동자들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과학적으로 설계된 발명품이자, 오늘날 우리의 감정과 소비 행동까지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소리의 과학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목차
- 기계의 소음과 인간의 피로, 소리가 필요했던 시대
- 조지 스콰이어 장군의 발명과 '자극 상승' 프로그램
- 공장에서 엘리베이터로, 공공장소를 정복하다
- 알고리즘의 플레이리스트, 감정을 설계하는 소리의 진화
1. 기계의 소음과 인간의 피로, 소리가 필요했던 시대
책에 따르면, 배경음악의 역사는 20세기 초, 시끄러운 공장의 소음 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공장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기계 소음과 단조로운 노동으로 가득 찬 공간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육체적인 피로뿐만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소음과 단조로움이 주는 정신적인 피로에 시달렸습니다. 특히 오후 시간이 되면 생산성이 급격히 떨어지는 '오후 슬럼프'는 모든 공장 주인의 가장 큰 골칫거리였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우리가 오늘날 휴식과 분위기를 위해 듣는 배경음악이, 사실은 이처럼 인간을 기계의 부속품처럼 여겼던 시대의 고민, 즉 '어떻게 하면 노동자들을 더 효율적으로 일하게 만들까?'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묘한 아이러니를 느꼈습니다. 세상은 노동자들의 귀를 즐겁게 해줄 무언가가 아닌, 그들의 피로를 줄이고 생산성을 높여줄 과학적인 도구로서의 '소리'를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2. 조지 스콰이어 장군의 발명과 '자극 상승' 프로그램
이 문제를 해결한 주인공은 미국의 육군 장성이자 뛰어난 발명가였던 조지 오웬 스콰이어(George Owen Squier)였습니다. 그는 1922년, 전신선을 이용해 음악을 송신하는 기술에 대한 특허를 냈고, '뮤직(Music)'과 당시 유행하던 카메라 브랜드 '코닥(Kodak)'의 이름을 합쳐 '뮤작(Muzak)'이라는 이름의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하지만 뮤작의 진짜 혁신은 기술이 아닌, 그들이 만들어낸 과학적인 음악 프로그램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심리학자들과 함께, 인간의 피로도가 15분 주기로 변동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에 맞춰 *'자극 상승(Stimulus Progression)'이라 불리는 독특한 음악 배열을 설계했습니다. 이것은 15분 동안 여러 곡의 음악을 점진적으로 템포와 악기 구성, 편성을 끌어올려 청취자의 활력을 자극한 뒤, 다음 15분은 의도적으로 침묵을 지키는 방식이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며, 뮤작이 단순히 '음악'을 판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에너지를 관리하는 프로그램'을 팔았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그들의 음악은 예술이 아닌, 노동자의 신경계를 자극하여 생산성을 높이는 과학적인 도구였던 셈입니다.
3. 공장에서 엘리베이터로, 공공장소를 정복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장에서 그 효과를 입증한 뮤작은 새로운 시장을 찾아 나섰습니다. 바로 사무실과 상업 공간이었습니다. 기업들은 뮤작이 노동자뿐만 아니라 사무직 직원들의 집중력을 높여준다고 믿었고, 백악관과 NASA까지 뮤작을 설치했습니다. 하지만 뮤작이 대중에게 가장 강력하게 각인된 공간은 바로 엘리베이터였습니다. 초기의 엘리베이터에 대한 사람들의 불안감과 공포를 완화시키기 위해, 부드럽고 안정적인 뮤작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엘리베이터 뮤직'이라는 별명의 탄생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기술이 어떻게 인간의 감정을 통제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시키는 도구로 사용되는지 똑똑히 보았습니다. 이후 뮤작은 호텔 로비, 병원, 그리고 마침내 쇼핑몰과 슈퍼마켓까지 모든 공공장소를 정복했습니다. 이제 음악의 목적은 생산성 향상을 넘어, '고객을 더 오래 머물게 하고, 더 기분 좋게 소비하게 만드는 것'으로 진화했습니다. 느린 템포의 음악은 사람들이 매장에서 더 천천히 걷게 만들고, 고급스러운 클래식 음악은 더 비싼 와인을 집게 만든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습니다.
4. 알고리즘의 플레이리스트, 감정을 설계하는 소리의 진화
책을 덮고, 저는 제가 있던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다시 한번 귀를 기울였습니다. 뮤작의 시대는 갔지만, 그 철학은 오늘날 알고리즘의리즘의 플레이리스트 속에서 더욱 정교하게 살아남았습니다. 이제는 스타벅스나 애플스토어처럼, 거대 브랜드들이 자신들의 브랜드 정체성에 맞는 음악을 직접 선곡하여 전 세계 매장에 실시간으로 스트리밍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는 우리의 기분과 취향을 분석하여 맞춤형 플레이리스트를 추천합니다. 소리를 통해 우리의 감정과 행동을 설계하려는 시도는 이제 더욱 개인화되고, 더욱 보이지 않게 우리의 일상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제가 무심코 듣던 이 배경음악이, 사실은 저의 기분을 좋게 만들고, 어쩌면 커피 한 잔을 더 주문하게 만들기 위해 정교하게 설계된 소리의 건축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장 노동자의 피로를 관리하기 위해 탄생한 소리의 과학. 그 보이지 않는 힘이 오늘 우리의 감정을 어떻게 조율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니, 앞으로는 아무 생각 없이 음악을 듣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귓가에 흐르는 그 음악은, 누구를 위해 연주되고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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