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일 아침 뉴스를 보며 삼성, 구글, 애플과 같은 거대한 기업들의 소식을 접합니다. 이 기업들은 물건을 만들고, 직원을 고용하며, 때로는 국가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문득 이 거대한 존재, 주식회사(Corporation)의 실체는 무엇일까 궁금해졌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오직 법률 서류 위에만 존재하는 '인공적인 인격체'.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저는 현대 금융 시스템의 탄생을 다룬 니얼 퍼거슨의 명저 『금융의 지배(The Ascent of Money)』를 다시 펼쳐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이 시스템이, 사실은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위대하고도 위험한 발명품 중 하나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저의 이 작은 호기심에서 시작된, 주식회사라는 보이지 않는 괴물의 탄생사를 함께 따라가 보겠습니다.
1. 법인격의 씨앗, 로마와 중세의 '단체'
책에 따르면, 주식회사의 가장 핵심적인 개념인 '법인격(Legal Personality)', 즉 단체를 사람처럼 법적인 주체로 인정하는 아이디어의 씨앗은 고대 로마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습니다. 로마법은 '콜레기움(Collegium)'이라 불리는 특정 목적을 가진 단체(종교 단체, 장인 조합 등)에 재산을 소유하고 계약을 맺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이는 단체의 자산과 그 구성원 개인의 자산을 분리하는 최초의 시도였습니다. 로마 제국 멸망 이후, 이 개념은 중세 유럽의 수도원과 길드(Guild)를 통해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특히 수도원은 개별 수도사가 죽거나 떠나도, '수도원'이라는 단체 자체는 영속적으로 존재하며 토지와 재산을 계속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오늘날 거대 기업의 영속성이라는 개념이 이처럼 오래된 역사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때까지의 단체는 외부의 빚에 대해 구성원들이 무한한 책임을 져야 했고, 주식을 발행하여 자본을 모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2. 대항해시대의 거대한 모험, 최초의 주식회사 동인도회사
'법인격'이라는 아이디어가 '주식'과 '유한책임'이라는 날개를 달고 괴물 같은 힘을 갖게 된 것은 17세기 대항해시대의 거대한 모험 덕분이었습니다. 당시 유럽인들을 사로잡았던 후추와 향신료를 구하기 위한 동인도 항해는 엄청난 위험과 비용을 수반하는 사업이었습니다. 배 한 척을 건조하고 항해를 준비하는 데 막대한 자본이 필요했고, 폭풍이나 해적을 만나 배가 돌아오지 못할 확률도 매우 높았습니다. 한 명의 상인이나 귀족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위험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602년, 네덜란드에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주식회사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가 탄생합니다. VOC는 두 가지 혁명적인 아이디어를 결합했습니다. 첫째, 회사는 주식(Share)을 발행하여 불특정 다수의 대중으로부터 자본을 모았습니다. 둘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유한책임(Limited Liability)'의 도입이었습니다. 이는 주주들이 회사가 파산하더라도, 자신이 투자한 주식의 금액만큼만 책임을 지고 개인의 다른 재산은 보호받는다는 획기적인 개념이었습니다. 저는 이 '유한책임'이라는 단어를 읽는 순간, 이것이 얼마나 강력한 마법인지 깨달았습니다. 만약 회사가 망하더라도 내 전 재산을 날릴 위험이 없어진 것입니다.
3. '유한책임'이라는 마법, 자본주의의 엔진이 되다
'유한책임'이라는 개념은 마치 마법과도 같았습니다. 이전까지 투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도박이었지만, 이제는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위험만으로 거대한 사업의 일부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이 마법의 갑옷은 사회의 자본을 끌어모으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었습니다. 귀족이나 대상인뿐만 아니라, 약간의 여윳돈을 가진 중산층, 심지어 하녀나 구두닦이까지도 동인도회사의 주식을 사며 '투자자'의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이렇게 모인 막대한 자본은 주식회사라는 그릇에 담겨, 개인이나 국가조차 시도하기 어려웠던 거대한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동인도회사는 자신들의 군대를 보유하고, 식민지를 건설하며, 심지어 전쟁까지 벌이는 '국가 안의 국가'와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며, '유한책임'이라는 안전장치가 투자자들을 회사의 위험한 행동에 대한 도덕적 책임에서 자유롭게 만들고, 오직 수익에만 집중하게 만들었다는 점이 조금은 서늘하게 느껴졌습니다. 이 강력하고 효율적인 시스템은 이후 산업혁명 시대에 철도, 광산, 공장 등 거대 자본이 필요한 모든 영역으로 퍼져나가며 현대 자본주의를 탄생시킨 가장 핵심적인 엔진이 되었습니다.
4. 보이지 않는 괴물의 두 얼굴, 현대 사회와 주식회사
책을 덮고, 저는 다시 한번 뉴스에 나오는 기업들의 이름을 바라보았습니다. 오늘날 주식회사는 우리 사회의 가장 보편적인 경제 조직 형태가 되었습니다. 혁신적인 기술을 개발하고,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하며, 우리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합니다. 하지만 이 보이지 않는 괴물은 동시에 여러 가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주식회사의 제1 목표는 '주주 이익의 극대화'입니다. 이 때문에 환경오염, 노동 착취, 사회적 책임 회피와 같은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단기적인 이익을 위해 이를 묵인하거나 조장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법인'이라는 비인격적인 가면 뒤에 숨어, 실제 의사결정을 내린 개인들은 책임을 회피하기 쉽습니다. 사람처럼 권리를 누리지만, 사람처럼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책임을 지지 않는 존재. 로마의 작은 법률 아이디어에서 시작해, 현대 자본주의의 심장이 된 주식회사. 이 보이지 않는 괴물과 어떻게 공존하며 그 힘을 통제할 것인가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져진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숙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에게 '회사'란 어떤 의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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