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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것들의 역사

미국 서부를 길들이고 전쟁의 양상을 바꾼 '악마의 밧줄', 철조망

by handago-blog 2025. 7. 29.

가시 돋친 한 줄의 철사, 철조망. 이 단순한 발명품이 어떻게 광활했던 미국 서부의 시대를 끝내고,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 속에서 '악마의 밧줄'이 되었을까요? 우리는 땅의 경계를 나누기 위해 담벼락을 쌓고, 울타리를 칩니다. 이 '경계'라는 개념은 인류 문명의 가장 기본적인 질서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 경계를 단 한 줄의 값싼 철사로, 하룻밤 사이에 수십 킬로미터씩 그을 수 있게 된다면 세상은 어떻게 바뀔까요? 여기, 인류의 공간 개념을 뿌리부터 뒤흔든 단순하고도 위대한 발명품, 철조망(Barbed Wire)이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자신의 재산을 지켜주는 고마운 울타리였지만, 다른 이에게는 삶의 터전을 빼앗고 자유를 속박하는 '악마의 밧줄'이었습니다. 어떻게 이 가시 돋친 철사가 광활했던 미국 서부 시대를 종식시키고, 나아가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비극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요? 지금부터 한 농부의 작은 아이디어에서 시작하여, 한 대륙의 운명을 바꾸고 전쟁의 양상마저 뒤바꾼 철조망의 날카로운 역사를 켄 번스의 유명한 다큐멘터리 시리즈 <서부(The West)>를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미국 서부를 길들이고 전쟁의 양상을 바꾼 '악마의 밧줄', 철조망

1. 울타리 없는 세상, 광활한 평원의 시대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철조망이 발명되기 전 19세기 중반의 미국 서부 대평원(Great Plains)은 말 그대로 '울타리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목초지는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닌, 모두의 것이었습니다. 이곳은 수백만 마리의 들소가 자유롭게 뛰놀고,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들이 그 뒤를 따라 유목 생활을 하던 공간이었습니다. 남북전쟁 이후에는 거대한 소떼를 몰고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하는 카우보이들의 '장거리 소몰이(Long Drive)'가 이 평원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소유'가 아닌 '공유'와 '이동'이 지배하던, 제가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다른 시대의 공간 감각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이 '열린 목장(Open Range)' 시대에 가장 큰 골칫거리는 바로 울타리였습니다. 동부에서 온 농부(Homesteader)들은 힘들게 일군 밭을 소떼로부터 지키기 위해 울타리를 치고 싶었지만, 대평원에는 울타리를 만들 나무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돌담을 쌓는 것은 너무나 많은 노동력을 요구했고, 부드러운 철사 울타리는 소들이 쉽게 밀고 들어와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이처럼 값싸고, 효과적이며, 쉽게 설치할 수 있는 울타리가 없다는 사실은 미국 서부의 정착과 개발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이었습니다.

2. 한 농부의 위대한 발명, '악마의 밧줄'의 탄생

이 거대한 평원의 운명을 바꾼 것은 위대한 발명가나 기술자가 아닌, 일리노이주의 평범한 농부 조셉 글리든(Joseph Glidden)이었습니다. 1873년, 그는 한 박람회에서 가시가 박힌 나무 울타리 아이디어를 보고 영감을 얻습니다.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두 가닥의 철사를 꽈배기처럼 꼬면서 그 사이에 날카로운 가시를 단단히 고정시키는 단순하고도 혁신적인 방법을 고안해냈습니다. 두 가닥의 철사는 가시가 헛돌지 않게 잡아주었고, 온도 변화에 따른 철사의 수축과 팽창 문제까지 해결해주었습니다. 1874년, 글리든은 자신의 발명품에 대한 특허를 취득했고, 이는 곧 '철조망'의 시대가 열렸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보며, 세상을 바꾸는 혁신이 종종 이처럼 현장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한 개인의 작은 아이디어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말처럼 높고, 돼지처럼 촘촘하며, 소처럼 튼튼하다'는 광고 문구와 함께 철조망은 불티나게 팔려나갔습니다. 하지만 농부들에게 '구세주'였던 이 발명품은, 평생을 자유롭게 이동하며 살아온 원주민들과 카우보이들에게는 재앙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파괴하고 들소와 소떼를 가두는 이 날카로운 철사를 저주와 경멸을 담아 '악마의 밧줄(The Devil's Rope)'이라 불렀습니다.

3. 서부 시대의 종말, 땅의 소유와 갈등

철조망의 보급은 미국 서부의 풍경과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가장 먼저, 열린 목장의 시대가 막을 내렸습니다. 텍사스에서 몬태나까지 이어지던 장거리 소몰이는 철조망 울타리에 가로막혀 더 이상 불가능해졌습니다. 카우보이들은 전설 속으로 사라졌고, 거대 목장주들은 철조망으로 자신의 땅에 경계를 긋고 소를 가두어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철조망은 농부들이 자신의 경작지를 소떼로부터 완벽하게 보호할 수 있게 해주었고, 이는 대평원의 본격적인 농경화와 정착을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은 피비린내 나는 갈등을 동반했습니다. 땅을 사유화하려는 농부들과 공유지를 지키려는 목장주들 사이에 '울타리 전쟁(Fence Cutting Wars)'이 벌어졌습니다. 밤마다 서로의 철조망을 끊고, 총격전이 벌어지며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하나의 발명품이 어떻게 한쪽에는 진보를, 다른 쪽에는 비극을 가져다주는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는지 그 서늘한 이면을 보았습니다. 철조망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는 더욱 치명적인 무기였습니다. 미군은 철조망을 이용해 원주민들을 좁은 보호구역(Reservation) 안에 효과적으로 가두었고, 그들의 전통적인 유목 생활과 들소 사냥 문화를 완전히 파괴했습니다.

4. 전쟁의 얼굴을 바꾸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

다큐멘터리를 보고 난 후, 저는 제가 보았던 시골의 철조망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미국 서부를 길들인 철조망은 20세기 초, 유럽의 전장에서 훨씬 더 끔찍한 '악마의 밧줄'로 다시 태어납니다.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양측 군대는 길고 지루한 참호전(Trench Warfare)에 돌입했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참호 앞에는 적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몇 겹의 두꺼운 철조망 지대가 겹겹이 설치되었습니다. 철조망은 기관총과 함께 보병 돌격을 무력화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어 무기였습니다. 공격 명령이 떨어지면, 병사들은 참호 밖으로 뛰쳐나가 적진을 향해 돌격해야 했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빗발치는 총알과 포탄, 그리고 결코 뚫을 수 없는 철조망의 덫이었습니다. 수많은 병사가 철조망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는 상태에서 무참히 죽어갔습니다. 참호와 참호 사이, 철조망이 가득한 '무인지대(No Man's Land)'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지옥이었습니다. 농부의 밭을 지키기 위해 고안된 평화로운 발명품은, 이제 인간의 살을 찢고 죽음으로 이끄는 가장 잔혹한 전쟁 도구 중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제 저는 녹슨 철조망 한 줄을 볼 때마다, 그 안에 담긴 서부의 종말과 전쟁의 비극을 함께 떠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무심코 지나치는 풍경 속에는, 또 어떤 놀라운 역사가 숨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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